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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권길상
ㆍ작성일 2021-01-15 (금)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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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유 신도비
 

권상유 신도비(權尙遊神道碑) 이의현(李宜顯) ()

 

권상유(1656~1724)는 안동 권씨 증 영의정 격()의 아들로 한수재 권상하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윤휴와 박세당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왕명에 의해 반박하는 변설문을 지어 농암 김창협의 찬탄을 받았다. 수원부사로서 관리의 비행을 적발하였고 족징·인징과 양역, 궁장의 절수 등에 대한 폐단을 주장하였다. 정호가 윤증을 논핵한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복직되어 국경 확정을 위해 관서접반사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었다. 1721년 신임사화때 소론에 의해 탄핵되고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특히 논어와 주역에 통달하였고 성리설에 해박하였다. 묘는 처음에 청풍에 썼다가 11년 뒤에 금산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이의현이 짓고 유척기가 전액하여 1741년에 비석을 세웠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권상유신도비(權尙遊神道碑)

 

이조판서 증시정헌권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 의금부 춘추관사 동지 경연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정헌 권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도곡 이의현이 글을 짓고,

 

선략장군 전 행 세자익위사 세마 민우수가 글을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사 감 춘추관사 유척기가 전액 한다.

 

숙종 갑술년(숙종 20, 1694)에 왕이 중전을 복위하고 과거를 베풀어 경사를 축하하였는데 구계(癯溪) 권공이 병과로 급제하였다. 공이 처음에 중전이 뒤바뀌는 변을 당하여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자기수양을 하니 당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내외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승문원에 선발되고 사국에 천거되어 들어갔다가 차례대로 자리를 옮겨 봉교에 이르러 시강원설서를 겸임하였다. 사간원정언에 승진하여 오도일(吳道一)의 언행이 거칠고 사리에 어긋나서 동궁의 빈객에 합당하지 않다고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정호(鄭澔)윤증(尹拯)은 유현으로 대우할 수 없다.’고 말하자 왕이 엄한 비답을 내리니 이로 인하여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게 되어 세도의 깊은 근심거리가 되었다. 공이 심하게 비방하지 않고 정확하고 상세하게 지적하니 말하는 자들이 마침내 말이 막히니 선비들의 의논이 칭찬하였다.

 

옥당록(홍문관의 관리)에 참여하여 수찬, 교리가 되었고 중간에 병조와 이조의 낭관, 헌납, 지제교가 되었다. 북평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곧 왕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로 돌아왔다. 강관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니 부응교 겸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유학자의 가문에 나고 자라서 경학이 매우 풍부하여 경연에서 왕의 마음을 열어 깨우침에 고금을 넘나들고 말하는 데에 반드시 근거하는 바가 있었다.

 

이때에 명사(明史)를 강론하면서 문장을 통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는데 보고하는 것을 분명히 심사하라. 마지막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라, 바른 사람을 들어서 바르지 못한 사람의 위에 놓으라.’는 등의 글을 인용해서 반복하여 말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그릇된 논리를 펴는 것을 가장 미워하여 일찍이 명나라 세종이 육학(남송 육상산의 이론)을 금지한 것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므로 실제의 효과가 더욱 요원하였습니다. 진헌장(陳獻章), 왕양명(王陽明)의 무리들이 서로 이어서 일어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고는 이어 주자와 육상산의 변론을 지극하게 아뢰었다.

 

윤휴(尹鑴)가 주자를 비방하고 능멸하자 그 유행이 널리 퍼져 박세당(朴世堂)이 사변록을 지어 주자를 배척하니 왕이 유신들의 상소에 따라 그 책을 모아 들여 태우라 명하고는 유신들에게 변론의 글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공이 조목마다 반박하고 구절마다 변론하였는데 의리가 명백하니 농암 김창협공이 그 학식에 깊이 탄복하였다.

 

조대수(趙大壽) 등이 시험을 주관하는데 사사로움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 드러나 옥에 갇혀 조사를 받는데 이익수(李益壽)가 옥관이 되어 구해낼 방도를 강구하니 공이 면전에서 배척하고 굽히지 않았다. 남구만과 유상운이 장휘재(장희빈의 오라버니)를 두둔하였는데 신사년의 변이 일어나니 공론이 모두 분개하였다. 합사해서 두 사람의 죄를 청하는 데 익수가 또 다른 의견을 내세우니 공이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공은 매번 나라를 편안하고 튼튼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일찍이 경연에서 이웃이나 집안사람에게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을 아뢰고 또 양역(良役 : 양민이 해야 할 국가에 대한 역무)과 군제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말하고 또한 궁장의 절수(折受 : 각 궁이 임금에게서 땅이나 결세를 자기 몫으로 받는 것)가 왕의 덕에 누를 끼치는 것을 말하였다.

 

계미년에 의금부에 있다가 발탁되어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귀신과도 같이 간악한 일을 적발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도적들은 모두 없어져 비상시의 북을 쳐서 경계할 일이 없고 일체가 잘 다스려지니 훌륭한 정사가 크게 퍼졌다. 처음에 공이 대궐의 직책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고을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였지만 곧 크게 성과가 있으니 이에 조정은 즉각 공의 공로로 돌렸다.

 

다음 해에 조정에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고 다시 동부승지, 이조 · 예조 · 공조의 참의가 되었다. 호남관찰사의 자리가 비자 여러 사람이 공을 첫머리로 추천하여 마침내 임명되었다. 남쪽 백성들은 이미 수원에서의 정사를 듣고 하나같이 귀화하니 힘들이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졌다. 백성 중에 숙부와 밭을 가지고 소송하는 자가 있었는데 윤리와 의리로 깨우쳐 주니 서로 감동하여 울며 소장을 찢어 버렸다. 기축년에 개성유수에 승진 임명되었다.

공이 연달아 지방의 관직을 맡아 계획하고 시행한 것이 많았지만 요체는 모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고 더욱 청렴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니 모두 비석을 세워 사모의 뜻을 보였으며 임지에 머문 기간은 짧아도 칭송하는 노래가 길거리에 가득하였다.

 

옮겨서 평안감사에 임명되었는데 공론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다시 대사성이 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정호(鄭澔)가 대사헌으로서 윤증(尹拯)을 논설한 것이 왕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홍문관의 관리 홍우서(洪禹瑞) 등이 글을 올려 간언하자 왕이 더욱 분노하여 정공을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공도 왕의 뜻을 거슬렀다고 하여 면직되었다. 후에 이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판과 한성좌윤,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정하는 일로 관서 땅에 오자 접반사가 되었다. 해적의 우환이 있어 변경백송을 다스리기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었다. 백성들의 상황을 살펴 남쪽지방에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펴고자 하였는데 공은 단심으로 지혜를 다하여 한결같이 오래 묵은 폐단을 깨끗이 고치고는 돌아와 보고를 하니 빗질한 것처럼 거의 정리가 되어 남쪽백성들이 고무되었다.

 

북쪽의 지방관이 오랑캐가 우리 국경근처에 집을 지었으니 당연히 금지해야 한다.’고 보고하니 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공은 율곡이 보를 설치한다고 중국에 올린 주문을 인용하고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말이 뒤섞여 나와 모두 어렵게 여겼다. 왕이 마침내 공의 계책을 사용하니 청나라 황제가 과연 부숴 버릴 것을 허락하였다.

 

하루는 경연 중에 신법(新法)에 대해 언급이 있었는데 공이 주나라에는 부포(인구에 따라 부과하는 포)가 있었고 한나라에서는 정전(중이 도첩을 받을 때 내는 군포의 대납금)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가장 시의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선조께서 주돈이 · 정자 · 장재 · 주자를 십철과 같이 올려 문묘에 모시라고 명하셨는데 실행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빨리 거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을미년에 특별히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는데 왕의 지우에 감격하여 충심으로 공경하게 지극히 하니 당시에 형정이 깨끗하다고 하였다.

 

이돈(李墪) 시험을 주관하는데 과거응시자와 서로 통하여 유배되어 병사했는데 그 손자가 신문고를 울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일이 형조판서에게 내려오자 원고피고 양쪽을 조사하니 말이 도리에 맞지 않아 형벌을 받게 되었다. 공은 특별히 용서하고 단지 판결문을 올려 왕의 재가에 일임하였는데 그 무리가 오히려 원망을 하였다. 병신년에 이르러 무뢰배를 꾀어 공을 무고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미 밝혀진 일을 반대로 날조하여 아뢰어 파면되었다. 글을 올려 소회를 밝히니 왕이 정중하게 답하고 후회하는 뜻을 보이셨다.

 

호조판서에 임명되는데 전에는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어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공은 굳게 지켜 새지 못하도록 하니 처음에는 자못 비방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재정이 여유가 있고 크게 호응이 있게 되니 백성들이 알지 못하다가 곧 기뻐하며 근래에 가장 잘한다고 다 같이 칭송하였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공무를 받들고 요행을 배격하며 은거한 선비를 관직에 등용하여 오로지 격려하고 분발시키는 데에 힘썼다. 남에게 영합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바르지 못한 사람은 비록 친해도 배척하고 위태로운 길에 뜻을 둔 사람은 비록 먼 사이일지라도 반드시 장려하니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흔들어 약화시키려 하여 네 번 이조에 들어갔으나 오래 있지 못하였다. 뒤에 다시 호조의 장관이 되었고 한번 지방의 감사가 되고 판윤, 참찬 겸 경연빈객이 되었다.

 

경종이 대리 청정할 때에 입대하여 경()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데 면려하고 경계함이 지극히 절실하니 경종이 감동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경청하였다. 명령을 받아 북관에 가서 시험을 주관하고 돌아와서 민간과 군병의 이해관계를 조목조목 나열하는데 그 말이 많이 법칙에 맞았다.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직하여 군대를 신칙하고 좀먹는 것을 방지하며 더욱 양곡의 운반에 유의하였다. 3년을 그렇게 하니 창고가 쫙 차서 넘치고 쌓인 것이 많아 담으로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자년 국상(숙종 승하)이후 사람들이 굳은 뜻이 없이 모두 흩어져 떠나 갈 것을 생각하니 공이 탄식하며 내가 선왕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아 위태로움을 보고 생명을 바쳐야 마땅하니 어찌 감히 떠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흉악한 무리들이 틈을 타서 드러나 충신과 어진 신하를 도륙하고 장차 위로 세자를 핍박할 계략을 꾸미니 공은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나 근심으로 슬퍼하고 감정이 복받쳐 병을 얻게 되었다. 숙종을 모시는 꿈을 꾸고 깨어난 뒤 시를 지어 기록하고는 마침내 별세하니 갑진년 410일이요, 향년 6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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