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川君 諱 瑊
자는 차옥(次玉). 고(考)는 증 영의정 화산부원군 휘 극화이며, 비(妣)는 의정부 좌참찬 조계생(趙啓生)의 따님으로 관향(貫鄕)은 양주(楊州)인데 세종5년(1423)계묘 10월15일에 공을 낳았다. 세종26년(1444) 공의 나이 22세 때 사직서 녹사(社稷署錄事)에 처음 제수되고 무공랑(務功郞)으로 제용감 부록사(濟用監副錄事)로 옮기고, 세종 32년에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로 천직하였다.
문종 2년(145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고, 세조 2년에 군기시 주부에서 황해도 도사(都事)로
옮겼다.
세조 3년에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으로 차임된 지 얼마되지 않아 송사(訟事)를 잘 다스림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애모하여 받들어 그 소문이 임금에게 보고되니, 세조 4년(1458)에 특지(特旨)로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승진되었다가 다시 호조정랑으로 옮겼다. 세조 8년에 통례문 부지사(通禮門副知事)를 거쳐, 세조 11년(1465)에 절충장군 대호군(折衝將軍大護軍)으로 승진되었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가 되었으니, 이는 일시(一時)의 현달이었다.
다음 해에 추충정란 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화천군(花川君)에 훈봉되었고 예종 1년(1469)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종 1년(1470)에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고, 다음 해에 순성명량 경제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겸봉(兼封)되었으며, 가을에 평안도관찰사, 성종3년에 사헌부대사헌을 지냈고, 겨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다음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고, 성종 9년(1478)에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叅贊) 성종 11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직하였고 성종 14년(1483)에
병조판서, 이듬해에 화천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공은 성종 18년(1487) 정미9월6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으니, 공의 연세는 65세였다. 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강직하여 정도(正道)를 굳게 지키고 아첨하지 않았다. 여러 대의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밝게 살피고 행실이 곧았으므로 공이 별세함을 듣고 사림(士林)들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성종 19년(1488)3월6일에 광주(廣州) 서면(西面) 옛 과주(果州)
땅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예에 따른 것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부지돈녕(副知敦寧) 유자해(柳子偕)의 따님으로 정부인에 봉해졌는데 자녀가 없었고, 후취(後娶) 조산대부(朝散大夫) 통례원판관(通禮院判官) 김계권(金係權)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맏아들 만형(曼衡)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의 사위로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다음 응형(應衡)은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다은 순형(順衡)은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이 行狀은 花川君의 誌石을 國譯한 것이다.]
⊙ 상(上)이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경을 도승지로 삼아 매우 융숭하게 대우하였고, 내가 즉위(卽位)한 후에도 여러 사무에 노고가 많았다. 또한 산릉(山陵:世祖가 돌아간 후 山役을 담당한 일을 말함)에 가서 제반 일을 점검하였으므로 특별히 품계를 한 등급 더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2월조>
⊙ 전교(傳敎)하기를,
"금번 청승습사(請承襲使:중국에 가서 왕이 즉위한 일이 정당한 襲位였음을 認可받는 使臣)는 도승지 권감을 사신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申叔舟)등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권감을 홍응(洪應)에 대신하여 사신으로 삼았다. 권감이 아뢰기를,
"송문림(松文琳)을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왕의 죽음을 고하고 諡號를 요청하는 使臣)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즉위년 11월조>
⊙ 이조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하늘이 돌보지 않아 우리 세조대왕께서 갑자기 신하를 버리더니, 얼마 아니되어 예종대왕께서 돌아가셨다. 세자는 병들고 어리므로 온나라가 어지러우니 우리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께서 세조대왕을 추모하며 나에게 대명(大命)을 정하였으므로 내가 들어와 왕업을 잇게 되었다. 내가 무거운 짐을 받고 밤낮으로 몸을 삼갔는데, 이때에 고굉(股肱)의 신료들이 이리저리 주
하고 마음과 힘을 다해 오늘에 이르니 인심이 안정되고 국가가 편안하게 되었다. 내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전(賞典)을 내린다. 신숙주 한명희 권감 최항 홍윤성 조석문 정현조 윤자운 김국광 등에게 좌리(佐理) 1등공신으로
삼는다. 좌리공신 1등은 칭호를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으로 하라."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성종2년 5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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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군(花川君) 아홀(牙笏)
화천군(花川君)께서 조회(朝會)할 때 휴대(携帶)하던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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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군(花川君) 필적(筆蹟) (예종(睿宗) 원년(元年) 西紀146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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