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행(幸)이요 성(姓)은 본래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이다. 신라 말엽에 김공 선평(金宣平) 장공 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범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욕보이니, 고려 태조가 변란을 듣고 구원하러 달려와 군의 북쪽 병산(瓶山)에 진을 치고 주둔하여 견훤과 대치하였다.

 

태사공이 두 사람과 상의하기를, 『무도한 견훤과는 함께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다. 태사공이 두 사람과 상의하기를, 『무도한 견훤과는 함께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병력이 적어 치욕을 갚을 힘이 없는데 지금 또 반드시 전쟁해야 하는 땅에 있으니 끝내는 섬멸당할 것이다. 어찌 왕공(王公)에게 투항하여 역적 견훤을 섬멸시켜 위로는 임금의 치욕을 갚고 아래로는  백성의 목숨을 보존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전 군의 백성들을 거느리고서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의 대첩을 세우니, 의로운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왕업이 이루어진 뒤에 고려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행(幸)은 기미(幾微)에 밝아 귀순하고 권의(權宜)를 아니, 권변(權變)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하고, 권씨 성(姓)을 하사하며 태상(太相)에 제수하였고 군을 승격시켜 안동부로 삼고 식읍으로 봉하였다.

 

벼슬은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 태사(三韓壁上三重大光亞父功臣太師)에 이르렀다. 돌아가시니, 부(府)의 서쪽 천등산 봉정사(鳳停寺)의 뒤에 있는 조화곡(造化谷)의 감좌(坎坐) 이향(离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아들 인행(仁幸)은 벼슬이 낭중(郎中)이다. 낭중공이 아들 책(冊)을 낳았는데, 책은 스스로 본읍의 관리가 되기를 구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칠대(七代) 동안 호장(戶長)이나 장교(將校)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초기에 예전부터 분할하여 웅거하던 호걸들로 하여금 각기 그 지방을 지키게 하여 민장(民長)을 호장(戶長)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자를 장교라 칭하고서 왕의 관리를 보내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리(外吏)의 시작이었다. 그 후에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고려조(高麗朝)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도록 고관 대작이 연이었다. 한편 관리나 백성이된 후손으로 부내(府內)에 살면서 향사(享祀)를 올릴 때마다 와서 제사를 돕는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사(府司)에 있는 삼공신(三功臣)의 묘우(廟宇)에 김공과 장공도 함께 모셔있으나 유독 권씨가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금대(金帶) · 옥생(玉笙) ·  관자(貫子) ·  시근(匙筋) 등의 물건에는 모두 우리 태사공의 손때가 아직 남아있으므로 백성들이 그 덕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 보물로 여겨 전하고 있다.

 

아! 신라의 운수가 끝나려할 때 역적 견훤이 방자히 흉포한 짓을 하니, 이 때에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고려의 군대 뿐이었다. 태사공께서 명망을 듣고 후덕한 이에게 귀의하자고 하여 양공과 상의해 계책을 결정하고서 여병(麗兵)을 맞이하여 군부(君父)를 죽인 적을 멸망시켜 더러운 풍기(風氣)를 막았으니, 이것이 고려 태조가 권변을 안다고 여겨 권씨 성을 하사하고 많은 공적과 아름다운 충열(忠烈)을 후손에게 남기어 더욱 드러나게 된 원인이다.

내가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하여 묘사(廟祠)를 참배하고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니, 많은 종인(宗人)들이 와서 나를 만나 전신(傳信)의 글을 보여주는데 달성(達成)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세보(世譜)의 서문과 부사(府使) 권응정(權應挺)이 지은 묘문(廟文)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묘비(墓碑) 음기(陰記) 등에서 태사공의 공덕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다만 묘역을 우러러 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현각(顯刻)한 신도비란 것이 없었다. 이는 과거에 세우지 않은 것이니 실로 흠이었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지난 날 묘역이 황폐하여 묘소를 잃은지 오래되었는데, 성화(成化) 연간에 공의 十八대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심력(心力)을 다해 찾다가 묘소 옆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그곳에 봉분을 만들었다.

 

옹(雍)이 운명할 때 자신을 동원(同原)에 부장(祔葬)하도록 유언하여 수호할 계책으로 삼으니 옹의 아들이 비(碑)를 세우고 표지(標識)하였다. 그러한 뒤에 비로소 이 언덕에 태사공의 묘소가 있는 줄 알게 되었다. 만약 전부터 묘도에 비석이 있었다면 어찌 그렇게 자손이 많으면서도 이처럼 묘소를 모를 수 있었겠는가. 서애(西厓)가 기록한 음기(陰記)에 이르기를, 권극지(權克智)가 영남관찰사로 종인들과 제사를 올릴 때 일하는 노예가 잘못 석물(石物)을 건드려 석물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니, 관찰사가 즉시 종인들과 함께 돌을 구입하여 다듬어 중건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비갈(碑碣)이지 신도비(神道碑)가 아니었다. 아, 세대가 유원(愈遠)하여 묘사(廟祀)가 정결하지 못하니 선령(先靈)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공의 외손(外孫)인 김광철(金光轍)이 부사로 부임하여 묘우(廟宇)를 중수하였고, 원손(遠孫)인 권철(權轍)이 관찰사가 되어서 제전(祭田)을 장만하여 전수(典守)할 비용을 주었으며, 권소(權紹)도 후손으로 제전을 더 마련하고 곡식을 출연하여 수리(首吏)로서 성이 권씨인 자에게 맡겨 이식(利息)을 받아 제물을 장만하게 하고, 또 묘역을 다스리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 후에 권반(權盼)이 묘우(墓宇)를 중수하였고 근래에는 감사 권우(權堣)가 재사(齋舍)를 건립하였으니, 전후의 조치한 일이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져서 유감되는 바가 없으나 오직 신도비만이 없을 뿐이니, 외비(外碑)를 세워 길이 전해지게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종당(宗黨)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웃 고을의 군수로 있으면서 『어찌 여러 종인들과 상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찬성하므로 즉시 돌을 다듬어 세울 자금을 마련하기를 상의하였다. 또 서울에 올라온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내가 감히 선인들의 옛 기록을 모아서 추리고, 누락된 것은 더욱 찾아서 삼가 전말(顚末)을 이상과 같이 갖추어 기록한다.